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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교육

한국 미술교육의 흐름

by 혁가 2023. 11. 9.

 우리나라 학교 미술교육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리된 자료는 거의 없다. 따라서 필자의 관점에서 갑오개혁 이전의 한국 미술교육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리된 자료는 거의 없다. 따라서 필자의 관점에서 갑오개혁 이전의 한국 미술사를 거슬러 올라가 여러 부분적인 자료들을 더듬어 보며 요약 정리해 보기로 한다. 

 일찍이 중국대륙과의 문물이나 문화교류를 통해 고유의 아름다운 예술문화를 꽃피워 온 우리 민족은 자연환경과의 조화 속에서 소박하고 솔직하며, 우미하고 창의성 있는 조형 세계를 이루어 왔다. 우리나라에서 회화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4~5세기경으로 추측되며, 당시로는 무덤 내부 벽면, 사찰의 벽면을 장식하는 실용적인 그림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먼저 회화를 발전시킨 고구려에서는 고분벽화가 성행하였는데, 이는 중국 한대 묘의 영향을 받아 축조된 것으로 추측된다. 대표적인 회화로는 통구 무용총의 수렵도, 각저총의 씨름도, 강서대묘 사신도 등이 있으며, 이를 통해 당대 우리 선조들의 풍부한 상상력과 힘차고 옹혼한 기상, 역동적인 표현력 등을 느낄 수 있다. 고구려는 불교를 일찍부터 받아들여 불교문화를 융성시켜 불상 조각들도 많았으리라 추정되며, 7세기 초에 호오류우지(법륭사) 금당벽화를 그린 담징이나 가서일, 자라며 등이 일본 불교화에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또 한 직업 화공이 배출된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지만 그들에 관한 교육 방법이나 기술 전수에 관한 상세 기록은 거의 전해지고 있지 않아, 현재로서는 전통적인 기능전수 형식의 교육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에 비해 보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조형미를 보여 주고 있는 백제의 불상 조각이나 회화는 고구려와 중국의 남조 양의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장승 요가 서역 화법의 영향을 받아 활동했다고 하며, 일본의 고대 회화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특히 6세기 말 쇼오도쿠 태자 상을 그린 아좌태자, 인사라야, 하성등이 일본 회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삼국시대에는 '한반도 내에서의 상호교류 측면과 더불어 백제와 남조, 일본 등과의 직접적인 교류에 의한 문화전파 현상'이라는 면에서의 문화 교류를 실감케 한다. 한편, 신라 미술의 특징은 위와 같은 외래적 영향보다는 대부분 호국 사상이 바탕이 되어 장엄하고 건강한 아름다움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미술품을 대표하는 신라의 금동반가사유상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입된 인도와 중국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아름다운 형태의 단순화와 풍부한 양감 표현으로 유명하다. 신라 특유의 고풍스러운 소박성과 강직성을 느끼게 하는 회화로는 천마도가 있는데, 이는 고대 스키타이족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반면 금속공예 분야에서는 우수하고 찬란한 금관총의 금관, 금귀고리 등 치밀하고 섬세한 누금기법으로 그 화려함을 나타내고 있다. 신라는 당으로부터 중국 궁정화가 유입되었고 말기에는 채전을 설치하여 회화의 발전을 꾀하였다. 신라의 채전은 신라시대의 채칠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감 1명, 주서 2명, 사 3명의 관원을 두었다. 651년, 682년에 확대 개편되었는데, 759년 전채 서로 고쳤다가 후에 다시 이 이름으로 고쳤다. 채전은 회화에 관한 업무를 관장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의 도화원, 조선시대의 도화서에 해당한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미술교육은 관이 주도하는 신라의 채전 이외에도 당시 직업화가에 해당하는 특정 소수에 한해서는 개인 또는 그룹별로, 기능전수자와 학습자 사이에 오늘날의 가정교 사식 개인 전수나 시범 등의 직접 교수법에 의한 소규모의 미술교육이 필요에 따라 이루어졌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조각, 공예와 화려한 문양이 발달하였다. 전하는 그림은 거의 없지만 전채서라는 그림을 다루는 관청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회화도 발달했으리라 추정된다. 당과의 빈번한 교섭으로 궁정 취미의 인물화, 청록산수화, 불교회화가 발전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청록산수 계동의 강한 채색 산수화인 황룡사 벽화를 그린 솔거와 당에서 활동한 장군 김충의가 있고 정화, 홍게 두 화승이 홍륜사 벽에 보현보살을 그렸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러 삼국의 회화, 불교 조각, 공예는 각기 다른 양식 등이 상호 통합되고 조화되었다. 불교회화가 활발히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대표적인 불교회화 작품으로는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가 있다. 기록마다 다소 상이점이 발견되며 상세한 기록을 찾기는 어려우나, 통일신라시대에도 회화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신라시대에 세워졌던 채전 성격의 회화관리소가 계속 기능을 발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궁중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불교회화가 발전하였는데, 실용적 기능의 작품뿐만 아니라 순수한 여가와 감상을 위한 작품이 제작되었다. 회화는 화원, 왕공 사대부, 승려 등 세 부류의 화가들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했던 관청으로 도화원이 있었다. 도화원이 중앙관청이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당시 서경에는 지방관청의 하나로 설치되었던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념의 예성강도, 송도팔경도 등 실경산수화가 태동하였고, 불교회화가 발달하였다. 또한 중국 회화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화풍으로 발전시켰다. 고려시대의 도화원은 훗날 조선시대의 도화서로 개칭되어 존속한다. 조선시대 미술의 사회적 배경은 주로 당시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적 사상과 후기에 실학사상의 대두와 함께 일어난 의식의 변화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