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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교육

발아기의 미술교육

by 혁가 2023. 11. 12.

 미술을 특정 계급의 교양이나 여가를 즐기는 기예로 여기던 미술교육에 대한 이러한 사고방식은, 구질서에 대항하여 근대화의 새 장을 열고자 했던 갑오개혁(1894) 이후부터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갑오개혁 이전의 서당을 중심으로 한 구제도하의 교육기관에서는 미술교육이라기보다는 모필에 의한 습자가 일률적으로 실시되었으며, 화가를 지망하는 사람은 도제제도에 의한 사숙에 들어가 수업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1895년부터 미술교육은 근대적 의미로서의 새로운 교육제도를 갖추고, 소위 신교육의 형태인 습자와 도화 교육을 구분하는 계기가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에서 학교에 의한 미술교육이 처음으로 실시된 것은 교육을 국가 중흥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1895년 4월에 설립한 관립한선 사범학교의 출범에서부터였다. 초등교원 양식을 목적으로 한 한성사범학교는 같은 해에 부속 초등학교를 개교하여 한국 최초의 공식적인 교육기관으로서 신교육을 담당하였다. 당시 소학교령에 공시된 심상과의 교과목인 수신,독서,작문,습자, 체조 가운데 미술교육에 상당하는 것으로는 습자가 들어 있는 정도였고, 도화는 체조 대신 추가할 수 있는 과목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도화는 필수과목으로 시행되었다기보다는 선택과목으로서 후일의 필수교과목으로 자리 잡아 가는 초기 미술 교과의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1906년 8월에 보통학교령이 공포되고, 심상 과에서는 습자, 도화, 수공 등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고등 과에서는 습자와 도화가 다른 과목과 함께 교과과정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미술교육의 형태는 주로 임화 위주의 수업이었고, 연필이나 모필로 하는 모방에 의한 교육이 대부분이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은 나라의 근대화가 시급함에도 위정자들의 끊이지 않는 권력다움과 내부의 혼란, 외세 열강들의 지나친 내정간섭과 그로 인한 지지 세력의 분열 등으로 극히 어지러웠다.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 한 일본은 아시아대륙 진출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노일전쟁(1904~1905)마저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대한제국(1897~1910)은 중립을 선언하고 노일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하지만, 일본의 강압에 의해 결국 '한일의정서'를 교환하게 된다. 이후 노일전쟁에서도 뜻밖의 승리를 거둔 일본의 세력은 아시아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고, 대한제국은 1905년의 한일협약에 의해 일본의 보호정치 아래 들어가게 된다. 이리하여 1906년에는 일본의 통감부 설치와 함께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하게 되는 비운의 시대를 맞게 된다. 이어 순종이 즉위한 1907년에는 전문 7조로 되어 있는 한일신협약으로 모든 사법, 행정사무는 통감의 감독,승인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구한말의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급기야 일본은 1910년 조선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강압적으로 한일합병조약을 공포한다. 이로써 519년을 이어 오던 조선왕조는 막을 내리고, 당시 근대식 교육이 기초적이나마 시행되던 우리나라의 외세 강풍에 밀려 근대교육의 발아 상태에서, 그로부터 약 36년간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한국의 근대 미술교육의 태동은 이러한 혼란한 국내외 정세와 18세기 이후 일련의 근대적 자각 현상을 바탕으로 발아되었다. 1910년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의 종료와 함께 일본에서 해방되기까지 한국의 미술교육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수행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의 관리하에 놓이게 된다. 국권 피탈 이후 무단정치를 감행했던 일본의 식민지교육의 일환으로서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한다. 당시의 교육이 처했던 상황을 살펴보면, 조선총독부 테라우치 총독의 교육방침은 1) 식민화 교육, 2) 우민화 교육, 3) 일본어 보급 교육, 4) 사상감시 교육의 4항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정책은 우리 민족의 거족적 투쟁이었던 3.1 독립만세운동 이후 사태의 심각성에 부응하여 새로운 지배 정책인 소위 '문화정치' 속에서 전면적으로 개정되었다. 조선교육령은 이후 1922년(제2차), 1938년(제3차), 1943년(제4차)의 단계적인 개정과 변천 과정을 거치고 이에 따라 미술교육도 단계적으로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조선교육령의 개정에 따른 미술교육의 변화를 간단히 살펴보면, 제2차 교육령의 개정에 의해 도화가 필수과목으로 바뀌고, 새로운 교과서인 '보통학교도 화첩'이 편찬되었다. 미술 재료 사용에 있어 1학년에서 4학년까지는 크레용을, 5,6학년부터는 물감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제  3차 교육령은 이미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등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전쟁수행이 시작된 시기여서 그 상황에 맞는 개정이 공포되었고, 그에 준한 '초등도화'가 발행되어 저학년에서는 생활과 관련있는 자유로운 표현을, 그리고 고학년에서는 생활을 중심으로 한 제재 외에 군함/군인/전차 등 군국주의와 황국신민사항 고취를 위한 도구적인 제재들이 부각되었다. 사상화, 도안화, 사생화, 임화, 용기화를 지도했으며, 관찰력 및 표현력 신장에 중점을 두었다. 제 4차 교육령은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침략야욕이 극대화 된 시기에 공포되었다. 도화 및 수공은 음악, 습자와 함께 '예능과'라는 통합교과로 편입되고, '에노홍' '초등과도화' 등의 교과서가 사용되었다.